글항아리/독서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mylim 2009. 8. 17. 00:26

문학과지성사에서 펴낸 이청준의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은 429페이지에 이른다.

소록도를 배경으로 정상인과 보균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복잡한 관계, 실상들을 그려나간 이 소설은 가늘게 - 가늘게 -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는 묘한 전개를 취하고 있다. 그래서 읽다가 중간에 쉬다 시간날 때 보는 그런 독서 방법이 통하지 않아, 한꺼번에 다 보고 나서, 며칠간 눈이 몹시 아팠다.

 

이 책에서 다시 읽고 싶은 글귀는 152 - 156페이지, 그리고 402-403페이지에 있었다.

 그 부분만 옮겨 보기로 한다.

 

' 주정수시대에도 명분이나  동기에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 문제는 오히려 그 명분의 지나친 완벽성, 명분이 너무도 훌륭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 명분에는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없었던 명분의 독점성이었다. 게다가 명분이라는 건 언제나 힘있는 자의 차지였다. 주정수는 최고 최선의 명분을 그 혼자 독차지 해버리고 있었다.'

 

' 환자들에게 낙원이 없는 한 소록도엔 낙원이 없었다. .. 명분은 믿을 것이 못되었다. 섬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 문제는 명분이 아니라 그것을 갖게 하는 과정이었다. 명분이 과정을 속이지 않아야 한다. 명분이 제물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천국이 무엇인가. 천국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마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 구하고 즐겁게 봉사하며 그 천국을 위한 봉사를 후회하지 말아야 진짜 천국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게다가 큰 명분의 뒤에는 알게 모르게 늘 누군가의 동상이 그림자를 드리우게 마련이었다. ..'

 

아래 글은 작중 인물 상욱의 편지형식으로 작가가 하고픈 말을 하고 있다

 

'도대체 어떤 절대 상황안에 격리되어진 인간 집단 안에서는 그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협의 관계에 의한 지배질서란 궁극적으로 그 상황의 벽을 무너뜨리는 순교자적 용기와 희생없이는 가능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스리는 자의 선의나 정의와는 상관없이 그리고 그의 지배권이 어디에서 연유했든 그것만은 끝끝내 절대 전제가 되어 있는 한  다스림을 받는 쪽은 항상 감당해 낼 수 없는 상황 자체의 압력때문에 스스로가 무력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불행한 사회의 질서란 우리가 흔히 믿고 있듯이 다중의 희망이나 기도같은 것과는 상관이 없이, 우선은 그 지배자 한 사람의 책임과 각성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슬픈 결론입니다'

 

' 건강인과 원생들 사이를 이어주는 가장 분명한 신뢰감의 확인( 이 소설에서는 건강한 서미연과 원생인 윤해원의 결혼)이며...

  그렇게 하면서 이 섬은 자신의 힘을 기르면서 진실로 그의 자유와 사랑을 행하고 그들이 운명을 선택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조원장의 말)' 

 

이 소설은 1974-75년에 쓰여 1976년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당시 개발독재 체제하에서 개발이라는 명분이 뚜렷한 당시에,  이 소설은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 왔었을 지 모르겠다.

 

이 책에서  '명분이 제물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 천국이 무엇인가. 천국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서 마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라는 문장은 요즘도 아니 아주 오랫동안 개인이나 사회 곳곳에 기억할 표현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이 소설의 작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얼마전 작가의 1년 기일이 지났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러나 그의 책은 세상에 남아,  30여 년 전 소설을 쉼없이 읽어 눈이 아픈 나와 같은 독자를 낳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책을 통해, 삶의 나이를 넘어 장수하는 유일 무이한 직업이 아닌가 싶다. 

 

단편 소설 <눈길>로 우리 식구들을 울렸던 작가 이청준, 그의 장편소설,  <당신들의 천국>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단, 읽을 때는 잠깐 잠깐 눈을 쉬어 주면서 읽으시길.  <2008.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