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과 시선/인물과 정책

흑인인권 확장과 킹목사 부부

mylim 2007. 3. 12. 13:48

힐러리의 패배인정으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버락 오바마로 확정되었다. 이로써, 백악관 최초, 퍼스트 잰틀맨 탄생은 좌절되었고, 이제는 최초 흑인여성 First Lady가 탄생할 것인지가 주목된다.    

 

이미 이전에 ....

수세기 동안 세상을 뒤흔든 세계적인 커플이 있었다. 육체와 머리의 만남으로 지칭되기도 한 육체파 배우 마릴린 몬로와 작가인 아서 밀러, 지성인들의 모범적인 커플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샤르트르와 보봐르, 미국인 이혼여성과의 결혼을 위해 영국왕위를 포기한  에드워드8세와 월리스 심프슨 등, 세인에 자주 오르내리는 커플들이 많지만, 특히 흑인의 인권에 대해 시선을 돌리게 한 킹목사 부부를 유심히 읽게 되었다. 

 

미국의 50-60년대 시민권운동을 주도하였던 마르틴 루터 킹은 고등학교때 9학년과 12학년을 건너 뛰어 15세에 고교를 졸업을 하였고, 1955년에 보스톤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부인인 코렛타는 성악을 전공한 음대생 출신으로 성악가의 길을 포기하고 목사부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둘은 교회와 정치적 모임, 거리 시위에 함께 모습을 드러내면서 인권활동을 계속해 갔다.

 

1955년 흑인여성 로자파크가 백인에게 좌석을 양보하지 않아 구속된  후, 버스이용을 거부하는 1년여의 비폭력운동이 전개되고 결국 몽고메리의 버스법을 수정하게 되었다. 1960년 몽고메리로부터 애틀란타로 이사를 간 후 버밍햄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비폭력 시위를 계속했다. 흑인을 위한 평등권에 관한 케네디법안의 통과를 촉구하기 위해 1963년8월28일, 20만명의 워싱턴 대행진을 하였다.

 

그 기념식에서 행한 연설은 세계 정치가들의 연설문 중에 으뜸으로 지금도 인용되고 있다. 연설문 중에 그는 흑인에 관한 차별을  부도난 약속어음으로 표현했다. 즉 100여년 전에 미국독립선언서와 헌법에서 모든 미국인들이 이어받게 될 생명과 자유, 행복추구권이라는 약속어음을 썼지만, 미국의 검은 피부색 시민들에게는 이 약속어음이 부도난 것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시위에 있어서는 간디의 비폭력운동을 이어받은 그는 196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 인권운동의 댓가로는 너무나도 가혹하게, 폭탄테러와 가족의 신변위협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던 킹은 결국 1968년4월4일 제임스 얼레이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검은 베일을 쓰고 장례식에 참석한 아내 코렛타는 계속 남편의 비폭력 투쟁을 이어, 엘리마에서 비폭력변화센터소장을 맡았고, 킹이 죽은 지 18년이 지난 후에 킹목사 생일에 가장 가까운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Martin Ruther King's Day'로 선포하게 되었다. 미국대통령(워싱턴과 링컨)기념일을 제외하면, 인명이 사용되는 유일한 국경일이다. 

 

사후에 국가적으로 존경을 받게 된 마르틴 루터 킹목사(1929-1968), 그러기까지 홀로 뒤에 남아 그의 뒤를 따른 코렛타 스콧 킹에 관하여 좀더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그러한 지면을 구하기 어려웠다. 

 

참고문헌 : 클라시커 50 커플, 2001. 바르바라 지히터만 지음, 박의춘 옮김, 해냄 출판사

               영미 민간고사와 민속, 2007. 남해출판공사(북경)

               미국역사, 2007, 남해출한공사

               36인이 말하는 21세기의 세계,2004. YBM(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