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항아리/독서

한국의 명문

mylim 2007. 5. 7. 12:57

1953년7월27일 판문점에서 있었던 휴전협정 조인식에 이승만대통령은 대한민국 대표를 보내지 않았고 서명도 하지 않았다. 3년1개월의 한국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기도 한 이 글을 보면 한국의 공식적 참가자가 한명도 없었고 일본인 기자는 열명이 넘었는데 한국인 기자는 두명 뿐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그 두 명 중의 한 사람이던 최병우기자의 글이다.

 

,白晝夢(백주몽)과 같은  11분간의 휴전협정 조인식은 모든 것이 상징적이었다. 너무나 우리에게는 비극적이며 상징적이었다. ... 한국의 운명은 또 한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것이다. 27일오전 10시 정각 동편입구로부터 유엔측 수석대표 해리슨장군이하 4명이 입장하고 그와 거의 동시에 서편입구로부터 공산측 수석대표 남일 이하가 들어와 착석하였다. 악수도 없고 목례도 없었다.

기이한 전쟁의 종막다운 기이한 장면이었다.북쪽을 향하여 나란히 배치된 두 개의 탁자위에  놓여진 18통의 협정문서에 교전쌍방의 대표는 무표정으로 사무적인 서명을 계속 할 뿐이었다. 당구대 같이 퍼런 융이 덮인 두 개의 탁자 위에는 유엔기와 인공기가 둥그런 유기기반에 꽂혀 있었다.... 한국어 영어 중국어의 세 가지 말로 된 협정문서 정본 9통 부본9통에 각각 서명을 마치면 쌍방의 선임 참모장교가 그것을 상대편으로 준다. 그러면 상대편 대표가 서명한 밑에 이쪽 이름을 서명한다. 

J자형으로 된 220평의 조인식 건물의 동익에는 참전 유엔13개국의 군사대표들이 정장으로 일렬로 착석하고 있으며 그 뒤에 참모장교와 기자들이 앉아 있다. 서익에는 부쪽의 괴뢰군 장교들, 남쪽에 제복에 몸을 싼 중공군 장교의 一團이 정연하게 착석하고 있다.

....

원수끼리의 증오에 찬 정략 결혼식은 서로 동석하고 있는 것조차 불쾌하듯이, 또 빨리 억지로 강요된 의무를 빨리 마치고 싶다는 듯이 산문적으로 진행한다. 해리슨 장군과 남일은 쉴새없이 펜을 움직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전이지 평화가 아니라는 설명을 잘 알 수 있었다.  ... 그 속에는 우리가 그리지 않은 분할선이 울긋불긋 우리의 강토(疆土)를 종횡으로 그려져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곳이 우리나라인가?' 이렇게 의아한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살고 죽어야 할 땅은 이것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자답하였다. 10시12분 정각 조인작업은 필하였다.'

 

1953년의 일이다. 나는 그때 태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며 그 해 여름의 한 장면을 또렷이 보는 듯하다. 그리고 힘이 있고 평화가 있는 나라의 국민으로 살고 싶다는 욕구를 갖는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보아 할 중요한 문장이라고 보아, 이 글을 주저없이 한국의 명문으로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