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박만도는 병원에서 나온다는 삼대독자 아들 진수를 마중나간다. 아무개는 전사했다는 통지가 왔다는데 살아 돌아오는 아들을 만나게 되니 아버지 만도는 어깻바람이 나서 일찍 기차역을 향해 간다. 용머리재를 넘으며 만도는 생각한다.
' 삼대독자가 죽다니 말이 되나, 살아 돌아와야 일이 옳고 말고. 그런데 병원에서 나온다 하니 어디를 좀 다치기는 다친 모양이지만, 설마 나같이 이렇게야 되진 않았겠지.'
그는 자신의 왼쪽 조끼 주머니에 꽂힌 소맷자락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처럼 팔뚝 하나가 몽땅 달아나는 일은 없었을 거라면서도, 내심 좀 불안하다.
아들을 마중하러 가는 길, 용머리재를 넘어 내리막길 끝에 있는 외나무 다리가 있는 작은 시냇물가에서 멈추었다.
' (시냇)물은 가을이 깊어지면서부터 밑바닥이 환히 들여다보일 만큼 맑아져 갔다. 소리도 없이 미끄러져 가는 물은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절로 이가 시려온다.'
일제시절, 만도는 징용을 갔었고, 사흘째 되는 날 황혼무렵 타고 간 배에서 내리게 되었다.
' 갑판위에 올라가 보니 하늘은 활활 타오르고 있고 바닷물은 불에 녹은 쇠처럼 벌겋게 출렁이고 있었다. 지금 막 태양이 물위로 뚝딱 떨어져 가는 중이었다. 햇빛 덩어리가 어쩌면 그렇게 크고 붉은 지 정말 처음이었다. 그리고 바다 위에 주황빛으로 번쩍거리는 커다란 산이 둥둥 떠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홀한 석양을 본 그들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숨막히는 더위와 강제노동과 잠자리만씩이나 한 모기떼뿐이었다.
산과 틈바구니에 비행장을 닦았는데, 연합군 비행기가 날아들자 산허리에 굴을 파들어 가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집어넣을 굴을 파기 위해 바위를 허무는 작업을 하던 중, 만도가 다이나마이트 심지에 불을 붙이고 굴을 나서자 마자 공습 비행기가 날아들어 다시 굴로 피신해야 했다. 그 때 불을 붙인 다이나마이트가 터지면서 그는 왼쪽 팔을 잃고 만다.
시간이 되어 기차가 도착하자 만도가 아들 진수를 만나는 장면이 이 소설에서는 가장 중요하다.
' 땡땡땡 종이 울자, 잠시 후 차는 소리를 지르면서 들이닥쳤다. 기관차의 옆구리에서는 김이 픽픽 나왔다. 만도의 얼굴은 바짝 긴장되었다. ... 만도의 두 눈은 곧장 이리저리 굴렀다. 그러나 아들의 모습은 쉽사리 눈에 띄지가 않았다. 저쪽 출입구로 밀려가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 두 개의 지팡이를 짚고 절룩거리면서 걸어 나가는 상이군인이 있었으나, 만도는 그 사람에게 주의가 가지 않았다.'
아부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 본 '만도의 두 눈은 무섭도록 크게 떠지고, 입은 딱 벌어졌다. 틀림없는 아들이었으나 옛날과 같은 진수가 아니었다. 양쪽 겨드랑이에 지팡이를 끼고 서 있는데, 스쳐간 바람결에 한쪽 바짓가랑이가 펄럭거리는 것이 아닌가...'
어버지 만도는 일제 징용에서 팔을 잃었고 아들은 한국전쟁에 나가 다리를 잃은 둘의 비극이 확인되는 순간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시냇물에 놓인 외나무 다리를 두고 아들 진수가 갈수 없자, 아버지 만도는 한 팔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다리를 꼭 안고 외나무 다리를 건넌다. 그 두사람 모습을 눈앞에 솟은 용머리재가 가만히 내려다 본다는 말로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작가인 하근찬은 경북영천에서 1931년 태어나 전주사범에서 교원생활을 하였고 1954년부터 토목과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는 궁벽한 농촌을 무대로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그로인한 농촌사회의 파괴와 심리적 상처를 그렸다고 한다. 이 수난이대란 작품에서도 외나무 다리를 외팔 아버지가 외다리 아들을 한팔로 안고 건너는 장면은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 보는 용머리재처럼, 읽는 이 역시도 그들의 아픔을 조용히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 지난 역사가 남긴 상처를 이대에 걸친 고통의 기간을 이 짧은 소설에서 생생히 알 수 있다.
과거를 현재까지 이어주는 것은 문자의 역할이다. 과거를 이으면서 마음을 울리는 것은 문장이다. 문장을 잘 다루는 데다, 과거 역사적 사건에 대한 시선을 갖고 있는 이런 소설가를 만난 것은 좀처럼 드문 행운이었다. 혹시 작가이신 하근찬님이나 하근찬님을 잘 아는 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해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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