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항아리/독서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1)

mylim 2008. 8. 12. 13:03

며칠 동안, 조지 오엘의 <1984>을 읽었다.  읽기 시작한 것이니까 끝까지 보긴 했지만 보는 동안 계속 기분이 나쁜 소설이었다. 바로 그 점을 조지 오엘이 노린 지도 모른다.

 

인간이 가장 불행한 상태를 그린 대표적 소설, 디스토피아의 대표작인 1984를 읽은 후, 기분을 전환하자고 유토피아에 대해 찾아 보았다. 언젠가  베르베르 책에서 본 것을 다시 찾아 보았다.  그리고 유토피아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고 알려진 토마스 모어에 대한 자료를 보았다. 토마스 모어를 읽다 보니 그가 헨리 8세에게 반대하다 억울하게 사형당한 부분이 보였다. 그래서 헨리 8세에 관해서도 알아 보았다. 중국에서 산 책인 <영국역사- 중대사건과 유명인물>이란 책에 토머스 모어와 헨리8세를 둘다 수록하고 있어 간단하게 볼 수 있었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높은 행복과 가장 아래에 있는 불행은 무엇일까? 그것을 주장한 작가들은 어떻게 생을 살다 갔을까? 

 

먼저 <1984>는 작가가 살았던 당시(1949년)로부터 약 35년 후인 미래 시점을 제목으로 붙인 것이다.

작가에게는 미래지만 2008년에 읽는 독자에게는 24년 전 과거일 뿐인 이 소설을 보면, 시점이 문제가 아니라 이런 상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개연성으로 인해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를 던져 준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1945년에 태어나 1984년에 살고 있는 당원이고 진리부가 일터이다.

당원인 그의 모든 일상은 텔레스크린이 주시하고 있다. 당의 우두머리는 빅브라더로서, 변함없는 찬양의 대상이지만. 그와 달리 골드스타인이란 한 명을 인민의 적으로 세워 그를 대상으로 이분간 증오 프로그램을 매일 실시한다.  그러한 프로그램은 참여자만이 아니라 어린 아이에게도 잔혹성을 키우는 사회 분위기를 형성한다. 

 

진리부는 지금 진실한 것이 영원히 진실하다는 당의 사고를 반영하기 위해 역사를 날조하고 현실을 제어하는 곳이다. 그 곳은 무엇보다 이중사고가 중요한 곳인데, 여기서 말하는 이중사고란 진실을 훤히 알면서도 교묘하게 꾸민 거짓말을 하는 것, 민주주의가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당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믿는 것을 뜻한다. 윈스턴은 모든 역사를 필요에 따라 깨끗이 지우고 다시 고쳐쓰는 일을 한다. 

 

하지만 윈스턴은 당원이 절대 갖으면 안되는 생각,  빅브라더를 타도해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다. 빅브라더가 이끄는 당은 내부로는 전복될 수 없고 피압박 대중인 무산 계급(노동자)에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당이 노동자를  통제하는 것은 쉬운 데, 그 이유는 노동자들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은 힘든 육체 노동, 가정과 아이에 대한 걱정, 이웃과의 말다툼, 축구와 영화, 맥주 등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윈스턴은 자신과 비슷한 사상을 갖고 있는 창작국에서 소설 제작기를 다루는 줄리아와 사랑을 하게 된다. 아이를 낳는 목적이 아닌 당원간의 사생활은 금지되어 있다. 이 둘은 그들과 같은 눈빛을 갖는다고 느낀 오브라인이란 당 간부를 찾아 가서 당을 전복하려는  지하 단체에 가입을 한다. 가입하면서 오브라인에게 받은 골드스타인이 쓴 책을 받는데 그 책은 전쟁과 통치자가 위기에 처하는 조건, 무산계급이 희망이라는 윈스턴의 생각과 동일한 주장이 적혀 있다. 

 

결국 오브라이언의 배신으로 두 사람은 밀회 장소에서 체포되고, 고문과 자백을 강요받는 장면이 길게 이어 진다.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당이 추구하는 것은 타인의 행복이 아니라 권력 그 자체이기에 영원히 전복될 수 없다는 오부라이언의 말이 나온다. 당의 권력은 권력자의 의사에 복종하는 지를 알아 보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고통과 모욕을 준다.  과거 개혁주의자들이 상상한 유토피아와 반대되는 세계가 당이 갖는 권력의 속성인 것이다. 오브라이언이 공포, 분노, 승리감, 잔인성 위에 문명을 세울 수 있다고 하자, 윈스턴은 공포와 증오 등에 문명을 세우면 생명력이 없기에 붕괴될 것이라고 반박한다. 마지막 인간 정신의 소유자로서 윈스턴이 빅브라더를 증오한다고 밝히자, 그는 쥐 고문실인 101호실로 가게 되고 그 곳에서 쥐의 고문을 눈앞에 두자 줄리아를 자기 대신 벌하라고 외친다. 이 때 마지막 인간 정신 조차 무너지는 대사가 나온다. 결국 윈스턴은 빅브라더를 사랑하면서, 총살을 당한다.

 

이 소설은 조지 오웰이 죽기 일년 전, 1949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소설은 인간 존엄이 없는 전체주의의 문제를 묘사한 것인데,  과거에 썼지만 전쟁에 관한 부분이나 지도자의 위기에 관한 것은 현대인에게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이다. 세계를 유라시아, 미국, 영국, 호주을 묶은 오세아니아, 중국과 우리나라 등이 포함되는 동아시아로 나누고 이들 간의 전쟁은 국지전이고 극소수 전문가들에 의해 행해지며, 소비재를 소모(과잉 생산 문제 해결)하는 데 전쟁의 목적이 있다는 표현이 나온다.

 

또한 지배계급이 권력을 상실하는 경우는 외부로부터 정복당하거나, 비능률적으로 통치하여 군중이 봉기한 경우,  불만에 찬 중간 계급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경우, 통치할 자신감과 의욕을 잃은 경우를 들고 있다.  이 중 앞의 세 위험은 거의 발생할 수 없다고 보는 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대중 의식이란 소극적인 방법으로 가벼운 영향만 주어도 조종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웰은 문자를 없애고 줄여서 사용하는 것을 신어라고 말하면서, 이 신어로 어휘 선택의 범위를 줄이는 것은 생각의 폭을 줄여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뇌신경을 쓰지 않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소설을 끝맺는다. 

 

소설을 다시 보면서, 되도록 옮기기 불편한 지독한 표현은 피하고 전체 내용만 알 수 있도록 요약하였다. 

<1984>를 보면, 24시간 텔레스크린이 없는 노동자들의 삶이 당원 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조지 오웰은 그렇지 않다. 텔레스크린이 없는 노동자를 동물과 같은 수준으로 간주하는 당의 슬로건으로 그의 시각을 내비친다.

 

특히 이 소설은 '어둠이 없는 곳이란 상상속의 세계일 것이다' 란 표현을 반복한다. 상상하지  않고 혹은 상상을 할 수 없고,  조작된 정보에 길들여진 무산계급의 무지는 바로 동물과 같은 상태임을 오웰은 말하려 한 듯하다. 

 

결국 한 사회가 전체주의로 가지 않으려 한다면, 즉 이런 디스토피아를 피하려면 인간의 상상을 확대하고, 자유가 주어지는 세계여야 한다는 메세지를 준다.

 

참고 : <1984>, 조지 오웰, 정회성 옮김, 민음사(2007년 발행)

 

디스토피아의 반대인 유토피아에 대해서는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2>에서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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