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과 시선/인물과 정책

구호기금마련: 중국송칭링기금회, 송칭링에 관해

mylim 2008. 6. 9. 18:20

받아 본 신문 한면 전체가 지진에 관한 구호를 위한 기금마련에 대한 내용이다. 신문은 중국송칭링기금회(China Soong Ching Ling Foundation) 연락처와 은행과 우체국으로 기부할 경우 연락할 계좌번호등을 싣고 있다.

 

 

 

중국은 중국이란 국가명칭을 개인이 쓰려면 국무원 허락을 받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름 앞에 중국이 들어 있는 송경령(Soong Ching Ling)은 과연 누구인가?

 

쑹칭링(이하에서는 칭링으로 부름)은 여성으로 그가 태어난 1893년부터 세상을 떠난 1981년은 중국의 근대와 현대가 빠르게 펼쳐진 격동의 시기였다.

 

칭링은 기독교 실업가인 아버지 뜻에 따라, 15세 되던 1908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서구식교육을 받게 되어 영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된다. 20세인 1913년 조지아주에 있는 웨슬리 대학을 졸업한 후, 22세 때 아버지의 친구이자 중화인민공화국의 창시자인 쑨원과 결혼한다. 27세가 위인 쑨원과의 결혼생활은 10년 후 사별로 끝나고, 그로부터 56년간 중국의 격동기속에 살다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칭링은 상하이 출생이고 그의 무덤 역시 상하이시내, 구베이 부근 얼통공원(유아공원)에 부모와 함께 묻혀 있다. 그녀의 무덤 바로 옆에는 쑨원이 아니라 자신보다 몇개월 더 일찍 떠난 고락을 같이 하며 살아 온 피고용인인 이연아란 여인의 무덤이 있다. 

 

칭링은 죽기 2주일 전,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으로 추대되어, 그녀의 묘는 물론 쑨원과 상하이에서 살던 가옥이 국가중점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상하이 쑹칭링의 가옥>  

 

 

 

그녀의 88년간 생은 크게 셋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번째는 쑨원이 사망한 후, 그가 남긴 뜻을 잇는 데 기여한 것이고, 두 번째는 항일과정에서 국내외에 항전의식을 높이고, 국민당(장개석)과 공산당의 대립을 넘게 만든 능력(제2차 국공합작), 세번째는 근대역사의 발전과정에서 그때까지 소외된 여성과 아동을 위한 복지사업에의 일관된 노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칭링의 일생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그 당시 중국의 역사를 알아 보기로 한다.

 

칭링이 태어난 1893년은 거의 사경을 해메는 것과 같은 청왕조가 지배하던 때였다. 만주족이 세운 청왕조는 1842년 8월 영국의 위협에 굴복하여, 샹하이, 닝보, 샤먼, 푸저우, 광저우 5개항을 개항하면서 그 항구의 관세권을 자주적으로 매기지 못하는 불평등한 난징조약에 동의해야만 했다. 그 후 1851년부터 14년간 난징을 수도로 한 태평천국의 난이 지속되어 청의 통치기반이 흔들렸고 칭링이 태어난 다음해인 1894에는 러일전쟁으로 중국은 금과 식량을 러시아와 일본에 징발당했다. 또한 청일전쟁의 패배로 1895년4월17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게 되면서, 이 조약에 따른 전쟁배상금을 물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게 되었다. 1900년, 기독교와 중국문와의 충돌로 시작된 의화단 사건은 외국 선교사의 본국구조요청에 따라 뻬이징이 점령되었다. 8개국연합군이 중국내 군대와 대사관을 설치할 수 있는 신축조약(빼이징의정서)으로 중국인 1인당 1냥이 할당된 거액의 배상금, 4억5천만냥을 지급해야만 했다. 이러한 가혹하고 억울한 중국의 현실개혁에 관해, 황제를 그대로 둔채 의회정치를 시행하자는 개량파와 아예 청왕조를 쓰러뜨리고 국민에게 주권을 안겨주자는 공화제주장파(혁명파)가 있었는데, 칭링의 남편인 쑨원은 혁명파였다. 

 

쑨원은 1894년 호놀룰루에서 홍중회를 만들었고, 1905년에는 여러 혁명단체를 일본에서 중국혁명동맹회로 통합한 후, 이 회가 주도한 1911년 신해혁명(제1혁명)의 성공에 따라 쑨원이 1912년1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임시대총통에 선출된다. 그러나 힘이 약했던 쑨원은 당시 강한 군벌 위안스카이(원세개) 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만다. 하지만 그의 위약으로  1912년에 신해 제2혁명이 일어나, 쑨원이 광동에 국민당정부를 수립하였다. 이 국민당을 수립한 후, 중국에 들어 온 자본주의 열강이 자국의 이권에만 눈을 밝히는데 실망한 쑨원은 소련공산당과 손을 잡게 되고, 1922년 소련사회주의정부의 원조를 얻어 중국공산당원과 합작을 제안하게 된다. 이것이 제1차 국공합작이다. 그러나 쑨원은 60이 되기 전, 국민당정부가 러시아 도움과 함께 광동에 군사학교를 수립하여 북벌계획을 세우던 중, 1925년 간암으로 죽고 만다. 이때가 칭링과는 결혼한 지 10년이 되는 해이고 칭링의 나이는 32세였다.

 

러시아 고문단은 장제스(장개석)에게 총사령관 자리를 맡겨, 1922년에 만들어진 국공합작군이 1926년에  북벌에 나섰으나, 1927년4월12일 장제스의 쿠데타로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고 만다. 이 당시 칭링은 장제스 규탄선언을 한 후, 쑨원이 남긴 뜻을 환기시키기 위해, 같은 해 8월 모스코바로 갔다. 그곳에서 칭링은 소련과 외교를 단절하려는 장제스에게 나라의 운명을 위기로 넣지 말라는 서신을 보냈다. 1930년까지 유럽에 머물다가 1931년 귀국한 그녀는 만주사변으로 인한 국가의 위기보다, 중국공산당인 홍군과의 싸움에 열중해 있던 장제스에 대해 다시 규탄서를 발표한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기 위해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39년부터 40년사이에 칭링은 온 국민의 항전의식을 높이고 세계인에게 파시즘에 대한 반대를 역설하였으며, 일본이 패전한 1946년부터 다시 국공내전이 전개되자 미국 국민에게 국민당에게 군사적 협조를 금지하는 호소문을 보낸다. 1946년부터 국민당과 공산당사이의 전면전에서 홍군의 공세에 밀린 국민당은 결국 모택동이 이끈 공산당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탄생을 선초하는 것을 바다건너 대만에서 보게 된다. 

 

칭링은,1981년 만성임파성 백혈병으로 죽기까지 30년동안 아동과 여성을 위한 복리활동에 헌신했다

그녀의 개인사를 보면 세 자녀를 둔 부인과 쑨원이 이혼한 후 결혼을 하였으니, 합법적이긴 하나 어딘가  흔쾌히 축하할 수 없는 부분일 수 있다. 그리고 결혼생활보다 다섯배가 더 긴 미망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국가적으로 국내가 두 조각으로 나뉘어 있고 국외로부터 불평등한 침략과 전쟁을 겪는 절대 위기 속에서 '행동하는 양심'을 보여 주었다. 칭링이 사후까지 명예주석이라는 최고의 호칭을 갖고 지금 국모로도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한 연설문을 살아 있을 때 스스로에게도 계속하면서 실천했기 때문이리라. 1924년 일본에서 한 연설 중 한 부분이다. 

 

'여성은 자신들만을 위한 명예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시민적, 산업상의 복지를 위한 여성활동에 참여하여야만 합니다.'

 

참고문헌: 세계의 여성리더, 2004. 전경옥외 3인 공저, 숙명여자대학교 출판국.

              미래를 여는 역사.2005. 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 한겨레신문사.

              거꾸로 읽는 세계사. 2006. 유시민. 푸른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