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의 행복과 불행이란 주제로 썼던 글이다. 미국역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미국 대통령 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1789년에 죠지 워싱톤의 부인인 마르타 워싱톤(Martha Washington)으로부터 시작된다.지금 우리가 부르는 대통령 영부인, 즉 First Lady의 역사도 이 때부터 쓰여지기 시작했다. 죠지 워싱턴장군과의 결혼이 재혼이었던 마르타 워싱톤은 대통령부인으로서의 역할을 1789년부터 1797년까지 훌륭히 해 낸것으로 평가된다. 그녀는 미국독립전쟁때 수천마일을 여행하면서, 부상한 병사들을 도와주었기에 그녀는 Lady Washington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그 후 메디슨 대통령의 부인인 돌리 메디슨(Dolly Madison)은 영국군과의 전쟁 중 영국이 워싱톤을 침략하여 불을 지르기 직전에 대통령 관저에 있는 귀한 문서를 대피시키는 공을 세웠다. 81세로 사망한 돌리 메디슨의 추모사에서 Zarchary Taylor는 "그녀는 반세기 동안 우리의 진정한 퍼스트레이디였기에, 미래에도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때 처음 쓰인 First Lady가 링컨 행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오늘날 우리가 쓰는 First Lady의 유래가 되었다.
백악관은 2대 대통령인 존 아담스 때(1800년), 워싱톤D.C를 새로운 수도로 정한 후 대통령 관저에 처음 입주했으나, 이 때 건물은 1812년 영국과의 전쟁때 불타 버렸다. 그 후 Monroe 정부(1817-1825)가 새로 지어서 흰색을 칠하여 이로부터 백악관으로 불리게 되었다. 많은 일반인이 동경할 수 있는 이 백악관에서의 생활은 대통령 부인의 개인적 취향과 가족의 불행한 사건들로 인해 어두운 역사기록으로도 남아있다.
1825년부터 1829년까지 재임한 John Quincy Adams의 부인인 Loouisa Adams는 가수이자 하프연주자였는데 백악관에서 연주가 금지되어, 백악관을 지루한 감옥(a dull and stately prison)으로 불렀다. 가장 불행하게 백악관 생활을 보냈으리라 보이는 First Lady는 1853년부터 1857년까지 재임한 Franklin Pierce의 부인인 제인 피어슨이다. 정치를 싫어한 그녀는 남편이 대통령에 지명된 후 곧 이어 두 아들이 열병과 기차사고로 죽었다. 그래서 그녀는 정치를 더러운 것으로 여겼고 두 아들의 죽음을 그러한 정치에 연관된 신의 벌로 생각했다. 그녀는 백악관에서 아들에 대한 회고를 쓰면서 세월을 보냈다. 이 두 경우는 어둡지만 그나마 4년 임기를 다 채운 경우이고 그밖에 4년 백악관 생활을 다 마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백악관 생활의 단명은 대부분 개인적인 불행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예는 대통령이 암살당했거나 대통령과 First Lady 자신이 병사하였거나, 임기전 사퇴한 경우이다.
가장 짧은 백악관 생활은 1개월로서 9대 대통령이던 윌리엄 헨리 해리슨 대통령으로서, 그는 취임 1개월 후에 질병(pneumonia)로 사망하였다. 그로서 그의 부인인 Hanna Harrison은 1841년 3월4일부터 4월4일까지 First Lady 로서 짧은 임기를 마쳐야만 했다. 남편의 암살로 인해 그만두게 된 첫번째 First Lady 로는 링컨대통령의 부인 마리 링컨(Mary Lincoln)이 있다. 그는 남부 켄터키 출신으로 남북전쟁 당시 남부인으로부터는 통합 동조자(Union Sympathies)로 경멸을 당했고, 북부인들로부터는 스파이로 의심을 받는 곤경에 처했다. 마리 링컨은 처음으로 백악관에 흑인을 초대한 First Lady 였으나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백악관에 머무르는 동안 1861년에 아들의 죽음, 1865년 남편의 죽음을 맞는 비운의 영부인이 되었다.
그 후 시민전쟁의 영웅인 제임스 가필드 대통령은 1881년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등에 총을 맞았지만 당시 의약이 발달되지 않아 결국 사망하여, 그의 부인인 Lucretia Rudolph Garfied는 남편의 장례식을 주도한 최초의 First Lady가 되었다. 그 후 두번째로 남편의 장례식을 주도한 First Lady는 제클린 케네디이다. 그녀는 1963년 달라스에서 케네디가 암살된 후, 전용기 에어포스원에서 당시 부통령인 린든존슨옆에서 남편의 피묻은 분홍투피스를 입고 지켜보았고 장례절차를 지시하였다. 부유하고 지적이며 아름다왔던 제클린은 남편의 대통령 당선의 최대 자산으로 작용하였고 미국 가족의 모델로 비추길 바랬으나 남편의 타살로 인해 1961년에 시작한 백악관 생활을 1963년11월에 접어야 했다.
이러한 단명한 백악관의 역사와 달리, 두번의 임기인 8년을 백악관에서 마치고 존경받는 노후를 보낸 First Lady도 있다. 초대 대통령 부인인 마르타 워싱톤을 비롯하여 앞서 말한 돌리 메디슨, 율리시스 그란트장군이자 18대 대통령의 부인인 줄리아 그란트(Julia Dent Grant)도 1869년에서 1877년까지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백악관 생활을 하였고,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부인 엘리노루즈벨트 역시 1933년부터 45년까지 비공식대사로서 국가에 봉사하고 차별종식을 위해 싸움으로써 가정 존경받는 First Lady가 되었다. 흑인 여가수인 마리안 앤더슨이 그당시에 흑인은 공연할 수 없었던 링컨 기념관 무대에 서도록 도와 준 그녀는 "A bearer of Goodwill"로 불리웠다.
8년간의 백악관생활을 무사히 마친 후, 대통령 부인의 지위가 아닌 자신이 획득한 정치가의 길을 가는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인 힐러리(Hillary Rodham Clinton)이 있다. 그러나 과거 클린턴 대통령의 재선을 앞두고 불거진 폴라 존스 성희롱소송 사건과 르윈스키 사건으로 얼룩진 클린턴 부부의 백악관 생활은 8년 중 아마도 절반만이 행복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재당선은 못되었지만 백악관에서 4년을 무사히 보낸 평범한 First Lady중에는 특히 결혼전 7년간 교사생활을 했던 아비가일 필모어(Abigail Power Fillmore)로서, 1850년부터 1853년까지 보낸 동안, 백악관안에 도서실을 설치했다. 대학(웨슬리여대)를 졸업한 최초의 영부인인 루시 웹 하이에스(Lucy Webb Hayes)는 1877년부터 1881년 사이에 19세기 금주운동의 지지자로서 백악관의 알코올 접대를 금지했으며 전화, 타자기등을 최초로 설치하였다. 특히 포드 대통령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포드(Elizabeth Bloomer Ford)는 1974부터 1977년까지 First Lady로 있을 때 남편이 반대한 평등권조항(Equal Right Amendment)을 지지하였고, 자신의 유방암과의 투쟁을 솔직하게 알려, 질병에 관한 경험을 대중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사람들이 아픔을 노출하여 자신의 문제에 직면하여 해결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재당선은 안되었다해도 주어진 기간을 값지게 보낸 셈이다.
지금까지 본 미국의 대통령 역사와 병행한 퍼스트 레디의 행복과 불행은 건강과 같은 개인적 조건과 더불어 정치적 환경에 지배됨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4년 혹은 8년간의 백악관 생활, 그 길고 짧음은 국민이 보장해 주므로 First Lady라면 국민의 요구에 대응하여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한국의 퍼스트 레이디에 대해서는 다음에...
* 참조: Amy Pastan의 First Ladies(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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